최소한의 근대성을 위해
Essay

최소한의 근대성을 위해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판사 저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 그게 제일 무서웠다. 고등학교 때 그나마 공부한 이유는 서울에 가기 위함이었다. 부산 외곽에 살았던 소년에게 서울은 대한민국의 한중간 같았다. 그렇게 서투른 기대를 안고 서울에 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변방이었다. 구글 지도를 끝없이 확대하듯, 중심이라는 관념은 가까이 갈수록 축소할 따름이었다.

  조급했다. 변방에서 중앙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3 때 겪어보지 않았던가. 지금처럼 풀어져 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지쳐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어느 정도 만족했던 것 같다. 나는 그게 -영악하게도- 소박한 심성이라고 생각했다.

  작년에 작은 좌절을 맛봐야 했을 때, 나는 쉬이 일어날 수 없었다. 내 존재가 흔들리는 듯했다. '중심'이라는 원을 넓혔을 뿐이지 중심-변방이라는 이분법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실수할 때마다, 세상의 기준보다 미치지 못할 때마다 불안했다.


 

나는 자신을 합리주의자 내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개인주의를 지지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싶지만 이는 사시로가 다르다. '남부럽지 않게'라는 말이 내게 큰 동력원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중심-변방의 구도 위에서 나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 속의 일원이다. 그래서 집단의 순위가 중요해지고 서열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에선 내 자리를 확인하곤 했다.

  개인주의는 내게 송곳같은 말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수호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타인과의 경쟁을 부추기고, 집단주의와 민족주의가 일상인 사회. '근대성'은 마치 옛날 말 같지만 아직 한국사회에선 쟁취하지 못한 그래서 제대로 비판조차 이뤄지지 않은 개념이다.

  나는 아직 개인주의를 쟁취하지 못했다. '쟁취'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다. 개인주의는 끝없는 투쟁 속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유석 판사의 글을 볼 때 뜨끔했던 부분이 많다. 전근대에서에서 살아가며 그 생활양식에서 충분히 이익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 듯하다.


 

<개인주의자 선언>은 제목만 들으면 사회의 무거운 쟁점을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개인주의는 저자의 가치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개인주의를 밀접하게 서술하는 것은 책의 머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정말로 다양한 주제를 포괄한다. 과열된 사교육 시장, 법조계에도 잔재하는 피라미드 구조, 인공지능과 신경 과학의 사회 속 휴머니즘... 에세이의 서두에 개인주의에 대해 구구절절 썼던 게 조금 무안할 정도로 <개인주의자 선언> 자체는 에세이집에 가깝다. 만약 진중한 사회철학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문유석 판사의 담백한 문체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묘미는 아무래도 저자의 문체라고 생각한다. 독서가 취미이자 장기라고 소개하는 저자답게 폭넓은 배경지식을 활용한 인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책이 현학적으로 보이기 쉬운데, <개인주의자 선언>은 그런 류는 아니다. 글이 '솔직'하기 때문이다. '가감없다'는 표현이 알맞다. 수식어는 최대한 자제하면서 자신이 느꼈던 바를 이야기 한다. 그렇다고 건조하지는 않다. 저자가 겪었던 일을 자주 말해주다 보니 책의 진도가 술술 넘어가고 그가 느꼈던 바에 공감하기도 편하다.

  마음 편하게 읽을 에세이, 그러면서도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부담 없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싶은 독자라면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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